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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반지하 가족과 지하실 남자, 계급의 벽이 만든 공존 불가능의 세계

by info6587 2025. 6. 28.

영화 기생충 포스터
영화 기생충 포스터

《기생충》(2019)은 봉준호 감독이 그려낸 대한민국 사회의 계층 구조와 빈부 격차를 블랙코미디와 서스펜스를 통해 압도적으로 해부한 영화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이 고소득층 박 사장 가족의 삶에 스며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욕망의 충돌과 사회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영화는 상징과 은유, 장르의 결합을 통해 '공존할 수 없는 계급'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날카롭게 묘파 한다.

반지하에서 바라본 하늘, 계급의 경계에서 시작된 이야기

《기생충》은 기택 가족의 반지하 공간에서 시작된다. 그들의 집은 지상과 지하의 경계에 있으며,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깥세상은 곧 ‘위로 향한 갈망’을 상징한다. 반면 위층, 박 사장 가족이 사는 고급 주택은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넓은 정원과 채광 좋은 창문은 여유와 권력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이 대비는 공간적 배치를 통해 시각적으로 계급을 각인시키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방식이다. 기택 가족은 백수 상태이며, 집 안에서도 와이파이를 공짜로 잡기 위해 손을 들어야 하고, 피자 상자를 접으며 근근이 살아간다. 이들이 박 사장 가족의 집에 하나둘 스며드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본격적으로 '기생'의 의미를 탐색한다. 하지만 《기생충》에서 기생은 단순히 착취 구조의 상징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누가 누구에게 기생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뒤집으며, ‘기생’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자체를 문제 삼는다. 서론은 이렇게 ‘기택 가족’이라는 인물군을 통해 시작된 계급 서사에 대한 탐색이다. 그들은 사기를 통해 새로운 삶을 얻고자 하지만, 이 선택조차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상승 경로라는 점에서 씁쓸함을 안긴다. 영화의 분위기는 코미디에서 출발하지만, 이는 단지 장르적 외피에 불과하며, 실상은 냉소적이고 잔혹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기생충》은 질문한다. “우리는 정말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가?” 그 질문은 곧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이며, 기택 가족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상징처럼 되풀이된다. 계단은 상승을 꿈꾸지만, 현실은 언제나 아래로 다시 굴러 떨어진다.

스며듦과 들킴, 욕망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들

기택 가족은 처음에는 '기민하게' 박 사장 가족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들은 전혀 가족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각자의 역할과외 교사, 미술 치료사, 운전기사, 가사도우미를 맡는다. 이들은 위장 취업이라는 방식으로 상류층 가정에 침투하지만, 그 침투는 폭력이 아니라 세련된 연극에 가깝다. 그러나 이 연극은 곧 경계의 붕괴를 불러온다. 영화의 중반부, 과거 가사도우미 문광이 다시 등장하며 숨겨진 지하실과 그곳에 숨어 사는 남편 ‘근세’의 존재가 밝혀진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완전히 전환된다. 단순한 코미디는 스릴러로, 사회풍자는 호러로 바뀐다. 근세는 그 자체로 ‘더 아래에 존재하는 계급’을 상징한다. 반지하보다 더 낮은 곳, 즉 존재조차 인식되지 않는 지하에 묻힌 사람이다. 기택 가족은 반지하에서 박 사장 집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그 아래에도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단순히 이분법적인 계급 구도를 넘어 더 복잡한 ‘구조적 다층성’을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장치는 바로 ‘냄새’다. 박 사장 가족은 기택에게서 '지하 냄새'가 난다고 말하고, 이는 계급을 감각적으로 구분 짓는 결정적 요소로 기능한다.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절대로 같은 공간에 속할 수 없다는 현실을 드러내는 장치다. 그것은 돈으로도, 교양으로도, 연기로도 지울 수 없는 ‘계급적 낙인’이다. 폭우 장면에서 기택 가족은 집으로 돌아가며 무수한 계단을 내려간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물에 잠기고, 변기조차 넘친다. 이 장면은 단지 자연재해를 넘어선 ‘사회적 재난’을 의미하며, 어떤 계층이 항상 피해자가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반면 같은 시간, 박 사장 가족은 아이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여유롭게 지낸다. 동일한 도시, 다른 삶. 결국 본론은 기택 가족의 침투가 어떻게 실패로 귀결되고, 사회 구조의 견고함이 어떻게 이들을 다시 ‘본래 자리’로 밀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이 과정을 매우 장르적으로 풀어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실로 묵직하다. 그것은 단지 빈부 격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격차를 가능케 하는 구조적 차별의 고발이다.

공존할 수 없는 세계, 기생의 끝에서 마주한 냉혹한 진실

결말에서 기택은 박 사장을 칼로 찌른다. 이는 단지 우발적인 분노가 아니다. 그 순간 기택이 느낀 ‘혐오’는, 단순히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절망과 좌절의 폭발이다. 박 사장이 ‘냄새’를 찡그리며 외면하는 바로 그 순간, 기택은 명확히 인식한다. 어떤 노력도 이 세계를 바꾸지 못하며, 어떤 위장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건 이후, 기택은 다시 지하이번에는 진짜 박 사장 집의 지하실로 숨어든다. 그는 더 이상 반지하가 아닌, ‘존재하지 않는 자’로 추락한다. 아들 기우는 그를 구하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다짐하지만, 영화는 그 다짐을 ‘희망’으로 끝맺지 않는다. 오히려 봉준호 감독은,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꿈이라는 점을 암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묻도록 만든다. 과연 구조는 개인의 의지로 넘을 수 있는 것인가? 《기생충》은 명확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구조 속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자들의 몸부림과, 그들이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 사장도, 기택도, 근세도 모두 ‘기생자’ 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생이 누구를 위해, 누구를 통해 유지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계단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층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층간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그 벽은 보이지 않지만, 냄새처럼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는 그 벽 앞에서 서로를 기생충이라 부른다. 《기생충》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학적 선언이다. 그리고 그 선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