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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잭의 집 예술인가 악인가, 광기의 건축물 속 인간 본성의 해체

by info6587 2025. 6. 25.

살인마 잭의 집 포스터
살인마 잭의 집 포스터

‘살인마 잭의 집(The House That Jack Built, 2018)’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발적인 작품으로, 연쇄살인범 잭의 시점을 통해 폭력과 예술, 도덕과 허무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형이상학적 대화와 신화적 구성, 그리고 극단적 영상 표현을 통해 관객을 심리적 불편함과 철학적 사유의 경계로 몰아간다. 자의식 과잉의 인물이 만들어내는 ‘살인의 미학’은 영화 예술이 어디까지 가능하고 허용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선언문이다.

예술의 탈을 쓴 악, 자기 해체적 서사의 도입부

‘살인마 잭의 집’은 연쇄살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예술의 윤리적 한계와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층위를 탐색하는 형이상학적 작품이다. 영화는 주인공 잭이 ‘버지(Verge)’라 불리는 존재와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 대화는 단순한 회고나 고백이 아닌,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파괴성과 그 파괴를 미학적으로 포장하려는 시도의 연속으로 기능한다. 이 대화는 단테의 『신곡』을 연상시키며, 현실의 지옥과 상징적 지옥 사이를 떠도는 ‘심연의 독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사의 구조는 선형적이지 않으며, 잭이 기억하는 다섯 개의 살인 사건을 ‘사건별 챕터’ 형식으로 나열한다. 각 챕터는 단순한 범행 서술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나 철학적 주제에 맞춰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첫 번째 사건은 ‘허술한 살인의 시작’을 보여주며, 범죄와 통제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비롯된 우연성과 허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챕터가 진행될수록 살인은 점점 정교해지고, 예술 작품처럼 구성되며, 잭은 이를 통해 스스로를 ‘예술가’로 규정하려 한다. 이 영화는 ‘폭력의 미학화’라는 위험한 주제를 대담하게 끌고 간다. 잭은 자신의 살인을 고딕 양식의 건축, 음악, 그림, 문학 등의 형태로 해석하며, 이를 ‘아름다움’으로 치환하려 한다. 그는 살인의 순간을 예술의 한 표현으로 믿고, 심지어 자신이 만든 죽음의 현장을 미장센처럼 다룬다. 이때 영화는 관객에게 불편함을 가하는 동시에, 그 불편함의 근원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왜 폭력에 시선을 고정하는가? 폭력을 미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예술로 용인될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은 서론에서 명확히 제시된다. 잭은 단지 살인범이 아니라, 자의식 과잉의 예술 지망생이며, 자신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인물이다. 그는 윤리보다는 미학을, 공감보다는 논리를 중시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이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그 인간성의 결여를 ‘지적이고 아름답게’ 제시하려 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살인마 잭의 집’은 단지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메타비평이며, 관객 스스로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윤리적 경계를 허용하는지에 대한 자문을 유도하는 작품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지점에서 관객을 도발하고, 동시에 불편하게 만든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의 첫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선언이 된다.

자기 합리화의 미학, 예술이라는 이름의 흉기

잭이라는 인물의 핵심은 그의 ‘자기 합리화’에 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들을 단지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예술의 일환이자, 표현의 수단으로 인식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 예술의 한계를 시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술이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현실을 반영하며, 때로는 이를 초월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잭은 예술을 현실의 폭력으로 구현하며, 도덕적 경계를 무시하고 미학적 언어로 이를 포장한다. 예를 들어, 잭은 살인을 ‘건축’에 비유하며 말한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짓게 될 집을 위해 살인을 축적해 나가고, 시신을 건축 자재처럼 쌓는다. 이 장면은 문자 그대로의 살인과 은유로서의 창작이 겹쳐지는 순간이며, 감독은 이를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비틀어낸다. 우리는 건축을 창조의 상징으로 받아들이지만, 잭에게 그것은 파괴의 결과물이다. 그가 지은 집은 인간의 피와 살로 만든 건축물이자,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공허의 상징이다. 잭이 끊임없이 인용하는 역사적 미술가, 건축가, 작곡가들의 이름은 그의 지적 허영을 반영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살인을 쇼팽의 음악이나 고딕 건축의 완성도와 동일시하며, 스스로를 ‘오해받은 예술가’로 자처한다. 이때 영화는 예술가의 자아도취가 어떻게 윤리와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적 환각 속에 빠져드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또한 영화는 관객을 방관자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불편함’을 유지한다. 살인 장면은 잔혹하고 길며, 윤리적 정당화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섬세하게 연출되고, 장면 구성은 미장센적으로 계산되어 있다. 이는 곧 관객이 폭력에 미적 쾌감을 느끼도록 유도하면서도, 그 쾌감 자체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잭의 논리와 철학은 끊임없이 관객의 시선과 태도를 흔들며, 도덕적 입장의 모호함을 노출시킨다. 결국 본론에서 ‘살인마 잭의 집’은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과 예술의 윤리적 경계를 교차시킨다. 잭은 예술가와 범죄자의 경계선상에서 줄타기하며, 사회가 강요한 도덕과 감정적 코드들을 비웃는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순수한 자기표현의 수단이자, 세속적 질서에 대한 반항이며, 동시에 자기 파괴의 서사다. 관객은 그 서사를 따르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 시선, 도덕을 되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론은 라스 폰 트리에가 던지는 질문—“예술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폭력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철저한 탐색이다. 잭은 단순한 악인이 아니다. 그는 윤리적 무정부주의자이며, 예술이라는 가면을 쓴 허무주의적 괴물이다.

지옥으로의 하강, 파괴의 미학과 잔혹한 자기완성

영화의 마지막, 잭은 버지와 함께 지옥의 경계에 도달한다. 이 장면은 단테의 『신곡』을 직접적으로 오마주하며, 잭의 내면 여정을 신화적 구조로 귀결시킨다. 그는 지옥의 깊숙한 구멍 아래 ‘완전한 집’을 발견하고, 마지막 구절에서조차 집착했던 완성의 환상을 따라가려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구멍을 건너지 못하고 낙하한다. 이 장면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그의 논리, 건축, 자아가 허상에 불과했음을 선언한다. 잭은 끝내 자신의 집을 완성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신이 갈망한 ‘절대적 의미’의 상징이었다. 그가 평생 쫓아온 것은 살인을 통한 자기실현이었지만, 그것은 곧 자기 파괴의 경로였음을 마지막 순간에야 자각하게 된다. 그는 건너편에 건너기 위해 무리하지만, 결국 그곳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으며, 낙하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그가 진정 ‘예술가’가 아닌 ‘괴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결론은 ‘살인마 잭의 집’이 영화라는 매체가 담을 수 있는 경계의 끝에 도달한 작품임을 시사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폭력의 미화가 아니라, 미화 그 자체가 갖는 윤리적 공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라스 폰 트리에는 잭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예술이라고 불렀던 것들에 내재된 폭력성, 자기 중심성, 그리고 공감의 결여를 파헤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단순한 영화적 경험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잔혹하고 철학적이며, 윤리적으로는 위험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동시에 우리 사회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감정과 경계를 용인하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살인마 잭의 집’은 우리 스스로가 ‘관객’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괜찮다고 느끼는지를 시험하는 질문이자, 불편한 거울이다. 예술은 반드시 위로와 감동만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편하고 잔혹한 질문도 허용되어야 하는가?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그 질문을 남기고, 스스로는 조용히 퇴장한다. 결코 잊히지 않을 불쾌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