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단순한 멀티버스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수많은 선택과 가능성으로 찢겨진 자아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감각적으로 질문한다. 압도적인 비주얼과 상상력 너머에 숨어 있는 것은, 결국 사랑, 가족, 그리고 자기 존재에 대한 통찰이다. 이 리뷰는 극장에서 마주한 혼란과 감동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영화가 남긴 깊은 울림을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혼란과 침묵 사이, '모든 것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에블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제목은 처음부터 압도적이다.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이 영화가 결코 평범한 서사를 따르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된다. 실제로 이 영화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 구조나 전개를 철저히 해체하고, 상상 가능한 모든 장르와 스타일을 마구잡이로 뒤섞는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처음 30분 동안은 마치 낯선 언어를 듣는 느낌이었다. 정신없는 컷 전환, 다중 우주를 오가는 구성, 캐릭터들의 어이없는 변주. 모든 게 너무 과장되었고, 동시에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 혼란은 곧 깊은 몰입으로 바뀌었다. 주인공 에블린(양자경)은 평범한 세탁소 주인이다. 세금 보고 때문에 회계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남편 웨이먼드는 언제 이혼 서류를 꺼내들지 모른다. 딸 조이와는 소통이 단절돼 있고, 아버지 앞에서는 여전히 ‘좋은 딸’ 코스프레를 이어가야 한다. 이런 일상은 사실 우리 모두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에블린이 ‘멀티버스를 구할 유일한 존재’로 지목된다. 무수한 자신들 중 가장 ‘실패한’ 자신이, 가장 강력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설정은 아이러니하면서도 묘하게 위로가 된다. 무엇 하나 잘한 것 없다고 느끼는 우리의 일상이, 어쩌면 가장 큰 가능성의 씨앗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혼돈 속에서 에블린은 수많은 자아를 경험한다. 요리사, 무술 고수, 오페라 가수, 심지어 손가락이 소시지인 세계의 자신까지. 이런 기묘한 설정 속에서도 영화가 놓치지 않는 건 바로 ‘감정’이다.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장면은, 바위가 된 두 존재가 침묵 속에서 텍스트로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였다. 말도, 음악도, 액션도 없다. 그저 바위로 존재하는 에블린과 조이가 건네는 짧은 문장들이 오히려 가장 깊은 감정을 일으켰다. 우리 삶이란 어쩌면 그렇게 침묵과 정적 사이에서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세계, 단 하나의 선택 사랑을 붙잡는 이유
멀티버스라는 개념은 요즘 영화계에서 흔한 장치가 되었지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 영화에서의 멀티버스는 기술적 설정이 아니라, 감정의 거울이다. 에블린은 무수한 ‘자신’들을 본다. 더 나은 삶을 산 자신, 유명하고 돈 많은 자신, 사랑을 끝내지 않은 자신. 그 모든 가능성 앞에서 그녀는 현재 자신의 불완전한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동시에, 딸 조이 역시 그런 세계들 속에서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에 질식하고 있다. 그 고통은 깊고, 현실적이다. 조이는 ‘모든 가능성이 다 실현된 순간의 허무’를 보여준다. 그녀에게 세상은 이미 끝난 게임이다. 어떤 선택도, 어떤 결과도 결국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녀는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에블린은 그런 딸을 바라보며 고민한다. 과연 무엇으로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이때 등장하는 것이 ‘웨이먼드’다. 언제나 소극적이고 유약해 보이던 이 남자는, 사실 영화 전체의 정서적 축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친절함으로 싸워.” 이 대사는 가슴을 때린다. 폭력과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웨이먼드는 끝까지 부드러움을 선택한다. 그는 무언가를 이기려 하지 않는다. 대신, 소중한 것을 지키려 애쓴다. 그리고 그 진심이 에블린을, 조이를, 결국 관객인 나까지 변화시킨다. 가장 눈부셨던 장면은, 멀티버스 속에서 에블린이 딸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뛰어드는 시퀀스였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현실이 흐트러진 그 상황에서도, 그녀는 끝까지 붙잡는다. “나도 너 같았어. 다 끝내고 싶었어. 그런데 지금, 네가 있어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 이 대사는 사랑의 모든 것이다. 이 영화는 결국 수많은 가능성의 이야기이지만, 끝내 단 하나의 선택을 찬미한다. 사랑하기로, 이해하기로, 붙잡기로. 그리고 그 선택이 우리를 구원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렇게, 혼란 속에서 정수를 찾아낸다.
모든 순간 속에서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단 하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극장 불이 켜졌지만 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이미지와 감정, 그리고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머릿속에 단 하나의 문장이 남았다. “지금, 여기, 너와 함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철학적이고 난해한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너무도 인간적이다. 가족과의 갈등,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 이해받고 싶다는 간절함. 이 모든 건 우리가 매일 겪는 감정이다. 멀티버스는 결국 하나의 장치일 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해’다. 그리고 그 이해는 곧 사랑이다.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껴안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중심이 된다. 양자경은 이 영화에서 말 그대로 ‘인생 연기’를 펼쳤다. 강인함과 유약함, 분노와 눈물, 혼란과 통찰을 모두 담아낸 그녀의 연기는 단지 훌륭한 연기를 넘어선 진실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단지 훌륭한 영화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삶의 어떤 지점에 조용히 박혀, 내가 흔들릴 때마다 “괜찮아. 너도 에블린이야.”라고 말해주는, 그런 존재의 위로로 남을 것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말한다. 당신이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든,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